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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 – 믿음의 끝에서 마주한 질문, 누가 악인가

by 미루나무 2025. 6. 18.

2016년 개봉한 『곡성』은, 단순한 공포를 넘어,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을 그린 철학적 심리극입니다. 외지인과 무명의 정체, 종교적 상징이 던지는 질문은 지금도 관객의 믿음을 시험하며 끝나지 않은 대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2016년도 개봉 영화 곡성 공식 포스터
본 이미지는 영화 리뷰 목적의 인용이며, 저작권은 ⓒ 20세기 폭스코리아에 있습니다.

목차

1. 외지인, 악의 실체인가 두려움의 투영인가

영화 속 외지인은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며, 관객에게 의심과 혼란을 심어주는 핵심 인물로 등장합니다. 처음 등장한 그는 무섭거나 위협적인 인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수줍은 모습, 낚시를 즐기며 산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평범한 이방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둘러싼 기이한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주민들과 관객 모두의 시선은 그에게 집중되고 긴장감은 고조됩니다.

그의 집에서 발견되는 사진과 개인 소지품, 의식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특히 그가 찍은 사진 속에는 사건 피해자들이 등장하며, 이들은 마치 홀린 듯 이상한 행동을 보입니다. 외지인을 살인자로 보는 시선과 초자연적 존재로 여기는 해석이 팽팽히 맞섭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무명과 대화를 나눈 뒤,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일광(황정민)에게 “당신이 졌소”라고 말하는 순간은 그의 존재가 악 그 자체임을 암시하는 결정적 단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일광이 그를 두려워하며 도망치는 장면은 외지인이 보통 인간이 아님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일부 평론가는 외지인을 “한국 사회가 외부에 품은 불안과 혐오의 상징”이라 해석합니다. 곡성에서 외지인은 단순한 악령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잠든 두려움과 불신이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릅니다. 감독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으며, 관객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말처럼, 그는 끝까지 해석의 문을 닫지 않습니다.

2. 무명, 구원의 손길인가 혼돈의 그림자인가

무명(천우희)은 영화 속에서 이름 그대로 정체를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붉은 옷을 입고 나타나는 그녀는 초월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등장하지만, 마지막까지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습니다. 구원자의 이미지와 닮아 있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존재처럼 다가옵니다.

그녀는 종구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외지인을 믿지 마라”, “지금 집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 이 경고는 단순한 조언이라기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분기점처럼 느껴집니다. 만약 종구가 그녀의 말을 따랐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이 물음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무명은 종교적 상징을 지닌 인물로도 해석됩니다.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기다리라”는 대사는 성경 속 베드로의 배신을 떠올리게 하며, 신념과 회의, 선택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녀는 진실을 전하는 존재이면서도, 그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 듯합니다. 하지만 무명을 전적으로 선한 존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녀는 일광과 협력하지 않고, 외지인과 직접 충돌하는 장면도 없습니다. 종구 역시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결국 더 깊은 혼란에 빠져듭니다. 경고를 전하지만 실질적인 개입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명은 관객의 불신을 자극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많은 평론가들은 무명을 이중적인 존재로 봅니다. 진실을 알리는 존재일 수도 있고, 더 큰 악의 얼굴일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관객의 믿음과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존재로 다가옵니다.

결국 무명은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관객의 신념과 불신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입니다.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 영화 곡성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며, 단순한 공포를 넘어 인간 내면의 복잡한 감정을 조명하는 작품으로 완성됩니다.

3. 믿음의 이름으로, 비극이 시작됐다

이 작품은 공포와 스릴러의 외형을 지니고 있지만,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종교적 상징과 철학적인 질문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듭니다.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어서, 인간의 믿음과 혼란, 구원과 파멸이 뒤섞인 복합적인 서사는 관객에게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곡성 속 외지인, 무명, 일광은 각각 악마, 천사, 인간 종교인에 비견되며, 서로 다른 믿음의 양상을 상징합니다. 외지인은 유혹자이자 악의 화신으로, 무명은 경고를 전하는 존재로, 일광은 제의를 행하지만 무력한 종교인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들 사이의 긴장감은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축으로 작용합니다.

닭이 세 번 우는 장면은 성경 속 “베드로의 부인”을 연상케 하며, 무명의 경고에도 종구가 집으로 돌아간 선택은 계시를 외면한 인간이 맞이하게 되는 비극을 상징합니다. 외지인이 죽은 척하는 장면이나, 일광이 고통받는 모습은 종교적 믿음이 오히려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이야기는 샤머니즘, 기독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 요소들이 충돌하는 가운데 혼란을 중심에 둡니다. 각 인물의 상징성과 사건의 전개는 복잡하게 얽히며, 관객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 종교는 세계를 해석하려는 인간의 방식으로 제시되지만, 어떤 믿음도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믿음은 구원을 향한 열망에서 시작되지만, 때로는 판단을 흐리게 하고 진실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종구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믿음을 선택했지만, 그 믿음의 끝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영화는 믿음의 이름으로 비극이 시작될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주며, 관객이 믿음의 본질을 다시 되묻게 만듭니다.

4. 끝나지 않는 해석, 이야기의 여운은 남는다

이 작품은 단순한 공포영화를 넘어, 철학적 질문과 깊은 상징을 품은 예술 영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 안에 담긴 다층적인 서사와 상징들은 시간이 지나도 끊임없는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외지인의 정체, 무명의 역할, 그리고 종교적 의미는 명확한 결론 없이 열린 방식으로 제시되어, 관객 스스로가 그 의미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도록 유도합니다. 관객의 경험과 시선에 따라 매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이 이야기는, 단순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넘어서 인간의 불완전함과 신념의 본질, 그리고 믿음이 인간을 어디까지 이끌 수 있는지를 묻는, 깊은 여운의 작품으로 남습니다.

이 작품은 명확한 해답 대신, 질문을 던지는 구조를 택합니다. 관객 각자가 자신의 배경과 감정에 따라 전혀 다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 방식은, 그들을 단순한 수용자가 아닌 능동적인 해석자로 만들어 깊은 교감을 가능하게 합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되묻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인간 내면의 두려움과 불신,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희망과 믿음을 고요하게 비춥니다. 무명이 과연 구원자인지, 아니면 혼란을 부추기는 존재인지. 믿음이 인간의 선택을 어디까지 흔들 수 있는지를 되묻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이 영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대화하고 있는 살아 있는 예술입니다.